49 십자가, 섬김이 답이다(마 20.17-34).

20221009(양무리교회)

 

 

 

십자가, 섬김이 답이다.

Matt. 20.17-34

 

 

    본문 관찰

  

    세 번째 수난예고(17-19)

    높아짐에 대한 대답(20-28)

    두 소경을 고치심(29-34)

  

 

주님은 십자가에, 제자는 주의 나라에서 좌우편에

 

    수난예고2(17.22-23)와 수난예고3(20.17-19) 사이 사람의 소리

    성전관리들 - 성전이신 주님께 성전세를 요구(17.24)

    제자들 - 천국에서 누가 크냐?(18.1)

    바리새인들 - 결혼과 이혼에 대한 율법으로 주를 시험(19.3,7)

    영생마저도 공로주의로 포장하려는 자들

       - 부자 청년(19.16,20)

       - 포도원의 품꾼들(20.11-12)

 

제자들의 영적 무지(헛발질)가 또 한 차례 반복된다.

바야흐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수난예고(17-19, 16.21, 17.22-23)를 하시는 장면에서까지 사고가 터진다. 십자가 죽음 앞으로 나아가시는 주님이시지만, 그러나 제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크고자 하는 으뜸이 되고자 하는”(26,27) 일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광이 너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 이 영광을 놓칠세라 모두가 서로를 향해 분히 여기면서 자리싸움 중이다(24).

주님은 죽기까지 낮아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천국의 좌우편 보좌까지 오로지 높아질 궁리만 하고 있다. 열 두 제자들은 다 자기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높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보다 조금만 누군가가 더 앞서는 것 같으면 분노하는 기색이 역력하다(21,24). 주님은 거듭해서 수난예고를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에게는 사람의 소리만 울릴 뿐이다. 이를 어찌할까.

 

 

섬기는 종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28)

 

놀랍게도 제자들은 181절 수준에서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8.1) 18장은 어느 시점인가. , 두 번째 수난예고에 이어지는 말씀이다(17.22-23). 더 놀라운 것은 그때는 물론이고, 세 번째 수난예고(20.17-19)가 선포될 때까지 제자들은 성장이 멈춰있다. 마치 성인아이와 같다. 지금 치맛바람을 주도하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그 어머니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22a).

그러나 보라. 22절에 의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좌우의 자리에 앉는 것은 다름 아닌 주님처럼 고난을 받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핵심이다. 앞서 주님은 고난 없이 영광도 없다!”(19.28-29), 그러니까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면 결국 제자들은 고난은 없고 영광만을 탐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제자들은 주님처럼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과 무관하기 때문에 천국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23).

그렇다면 제자들이 관심을 갖고 목표 삼아야 할 제자도는 고난과 죽으심이라는 길을 통해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다(26-27). 이것은 주님 자신처럼 살아달라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기도 하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28)

당신마저도 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님을, 도리어 섬기러 오셨음을, 이를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마저 십자가에서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다면 자리와 영광을 위한 싸움 좀 그만하고 이제는 정신 좀 차리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내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제자로 살겠다는 것이라면 그 중심에는 섬김의 원리가 자리해야 한다. 여기에는 아무런 보상도, 대가(對價), 반대급부(反對給付), 연공서열(年功序列)도 필요 없다. 오직 사랑하는 이를 위해 애쓰고 땀 흘리는 섬김이 있을 뿐이다.

 

 

부스러기 묵상

 

    [두 가지 소리]

    ■가짜: 세베대의 어머니 & 아들들

      •-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우편에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21)

      •- “할 수 있나이다.”(22b)

    ■진짜: 맹인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30,31)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33)

 

언제나 진짜 소리는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30-33).

제자들마저 동상이몽(同床異夢, 21,23, 18.1) 중이다. 그런데 이 때에 예수께서 여리고에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이다는 소리를 들은 맹인 두 사람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30,31)라고 외친다. 수난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허튼소리만 만발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사람들 속에서 진정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가를 생각나게 하는 소리가 맹인들에게로부터 들려온다.

비록 육신의 눈은 감겨있다. 그렇지만 마음과 생각과 심령의 눈이 오히려 그들’(제자들, 29a)과는 달랐다. 제자들은 끝없는 이 세상의 욕망 덩어리들을 주님께서 더해주시기를 요구하고 있을 뿐이다. 어찌된 게 세속적 욕망과 욕심과 탐욕을 위해 예수님마저 이용하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응답해야 할 대답은 어느 쪽이어야 하는가.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처럼, 그의 두 아들들처럼이 아니다(21). 오히려 두 소경처럼 응답해야 한다: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33) 저들은 주님이 고쳐주시리라 믿었기에 이를 구하고 있다. 한편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서서 소경들을 보시면서 부르셨기 때문에 그들’(제자들)는 물론 주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도 이 대화를 다 보고 들었다(29,32).

비록 육신의 눈을 멀었지만 영적 눈은 밝게 떠서 주님을 향해 담대하게 믿음의 언행(言行)을 보이는 두 맹인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영육(靈肉)의 두 눈이 다 멀어있는 부끄러운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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