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3 - 물고기뱃속신앙훈련학교(욘 1.17)

20201101(양무리교회 

 

 

 

3강_ 물고기뱃속신앙훈련학교

Jon. 1.17 

 

   본문 관찰

 

   하나님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개역 개정판).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3일을 고기 뱃속에 있었다(표준새번역).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셔서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3일을 고기 뱃속에 있었다(표준새번역).

   

 

듀엣(Duet) - 하나님은 이미, 요나는 아직

 

    [1.1-17]                 여호와(1)    ~    여호와(17)

   ▪하나님       말씀(1) 큰 풍랑(4) 제비뽑기(7) 물고기(17)

   ▪요   나       그러나(3) 그러나(5) 대답1(9) 대답2(12) 15

   ▪그 사람들  두려워하여(5) 두려워하여(10) 두려워하여(16)

 

요나는 이미 깊은 바다 속에 있으나 아직 죽지 않고 살아있다.

그는 다시스 큰 풍랑 선장 제비뽑기 그 사람들’(선장, 사공, 무리) 깊은 바다, 그리고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참으로 당당하다. 죽음, 그것도 스스로 죽기를 구하며 하나님의 명령(사명)을 철저하게 거부하면서도 말이다. 하나님을 만나던 소명자의 자리에서 어느 틈에 오만 잡동사니로 가득한 물고기 뱃속의 후미진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실패자 요나를 발견한다(1 17). 마침내 무대는 물고기 뱃속이다. 하나님이 원하신 니느웨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이 원하던 다스도 아니고, 그런데 바다 속 깊은 곳이자 물고기 뱃속까지 밀려갔다.

   

 

요나 스타일(style)

 

요나는 선지자의 사명을 포기한다. 참으로 난감하고 혼돈스럽다. 불순종하면서도,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에도, 하나님과 반대편으로 움직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그러고도 살아있고, 또한 하나님은 그런 인생을 그대로 살려 두신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길래 이렇듯 황당하다 못해 철면피와 같은 배은망덕한 인생들을 그대로 두시는 것일까.

단지 요나에게만 그러셨다면 좀 야속하고 섭섭하겠지만 요 나!’ 또한 이처럼 살고 있고, 하나님은 지금껏 그런 요 나!’ 또한 살려두고 계신다. 인생은 요나처럼 언행(言行)해도 살아있다. 참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구약의 요나나, 신약의 요 나!’만이 아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살았음에도 하나님이 요나처럼 대접해 주신 사람들이 많다.

 

갈멜대첩의 선지자 엘리야(왕상19.1-21)

엘리야는 하나님이 위대하게 쓰신 사람이었고, 바알의 거짓 선지자들과 벌인 갈멜대첩이라는 영적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탁월한 선지자였다(왕상18.1-46). 그런데 이 엘리야는 아합왕가 악녀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하자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광야로 들어가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왕상19.3-4)라며 영적(靈的) 침체에 빠져 버린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청지기()라고 해서 위기와 시험이 없는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요나 역시 사명 뒤에 찾아온 위기였고, 엘리야 또한 승리 뒤에 찾아온 침체였다. 하나님은 기회를 주시지만 인간은 그것을 위기로 바꾸어 버렸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에게 일용할 양식(왕상19.5-8, 떡과 물)과 생명의 양식(왕상19.12,15-18, ‘세미한 음성’)을 통해 변함없이 찾아오셨고, 그를 선지자로 회복 시키셔서 다시 파송하신다. 그는 다시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로 회복된다.

 

탕자 형제들(15.11-32)

둘째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아버지의 품을 떠나 집밖의 탕자가 된다. 아버지 따로, 자기 자신 따로라는 선택을 통해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고 선언한다. 그리고서 아버지와 멀어지는 그 자신의 다시스(‘먼 나라’)인 로망을 따라 내려간다. ‘집안의 탕자인 큰아들도 같기는 마찬가지다. 역시 그도 아버지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다. 아버지가 좋아하고 즐거워하시는 것에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역시 자기 방식대로 언행한다. 그는 자기 동생이라는 니느웨가 회개하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한편 이 두 아들을 설득하는 아버지는 요나의 하나님과 동일하다. 아무도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결코 아버지로서의 자리와 역할과 사명을 포기하거나 바꾸지 않으신다. 지금 요나의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다.

 

오늘 우리시대에도 요나 식으로 살아가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초신자들보다는 소위 하나님에 대해서 좀 안다는 사람들일수록, 성경을 많이 읽고 공부했다는 사람들일수록, 비교적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한 사람들일수록 요나처럼 자기 식대로 살아가는 경향이 강하다. 아들과 딸이고 자식이지만 부모에게 한없이 무례하고 버릇 없는 사춘기를 지나는 자녀들처럼 하나님을 이처럼 대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상하게도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요나는 지금 하나님의 임재와 찾아오심을 경험한 선지자임에도 요 모양 이 꼴로 실패한 자리에 서 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그 자신은 자기가 잘못되었거나, 자기 생각과 결정이 틀렸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을 좇아 행동해 버린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리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

요나는 이방 니느웨와 그 백성들이 하나님처럼 낙관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3.10 4.1-2). 이처럼 세상이라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성경대로 했다가는 결코 재미 볼 수 없다는 생각이 남아있는 한 그는 아직 1장의 요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결코 하나님께 항복한 사람이 아니다. 마음도 몸도 생각도 태도도 말하는 것에서도 요나는 함량미달이어서 그렇다.

예를 들어, 불신 결혼을 성경이 명백하게 거부하지만 -“너희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고후6.14a)- 어디 현실이 그런가. 그러니 조건이 좋으면 결혼해서 예수 믿게 만들면 되지 뭐!” 그런다. 이것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스로 바꿔버린 현대판 불순종이다. 이렇게 말하면 그럼 노처녀/노총각으로 늙어 죽으면 누가, 목사가 책임져 주냐?”라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그럼 조건이 영 아니올시다여도 같은 고백을 하면 될텐데 말이다. 결국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니까 자꾸 다시스로 내려가는 유혹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스에는 행복도, 기쁨도, 축복도 없다. 1장 같은 혼돈만 있을 뿐이다.

이런 요나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의 뺄셈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 못난 불순종의 요나와의 파트너십을 포기(파기)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저를 다시 선지자로 받아주신다. 하지만 요나 스타일을 고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마치 자신들이 대단해서 하나님의 이런 은총을 누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정말 구제 불능이다. 인생이 만나는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을 믿지 못하고 놓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불신앙이 그것이다. 하지만 요나처럼 살아도 그런 꼴통(고집쟁이)에게 희망의 여백이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인자하신 사랑 때문이다. 이는 결코 인간의 선함 때문이 아니다(9.14-18).

참으로 기막힌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때 뺄셈부터 하신다.” 요나 역시 그렇다. 하나님은 비록 그가 아직은 깨닫고 있지 못하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을 철저하게 뺄셈하신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를 덧셈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니느웨, 큰 풍랑, 물고기 뱃속을 통해 그를 다시 쓰시고자 요나에게 불필요한 모든 것을 뺄셈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뺄셈은 하나님의 축복(섭리, 사랑, 은혜)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요나는 이 진리를 물고기 뱃속에서 깨닫는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등장할 때 하나님은 그를 하나님의 뺄셈 앞에 세우신다. 아브라함도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뺄셈에서(12.1- ), 아버지의 총애를 받으며 채색옷을 입고 살던 요셉에게 구덩이에서부터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가족을 구원하기까지의 13년이라는 끝없는 뺄셈에서(37.1- 41.37-46 46.1-27), 바로의 아들에서 도망자가 되어 광야의 야인이 된 모세에게 불어닥친 광야 40년이라는 뺄셈에서(2.1- 3.1- / 7.20-37, 11.23-26), 사무엘 선지자에게 어린 소년의 때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으나 30세에 두 번째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기까지 다윗의 파란만장한 삶에 계속되는 뺄셈에서(삼상16.1- 삼하2.1- ), 그렇게도 잡고 싶었던 고기는 물론 그물과 배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던 베드로의 뺄셈에서(5.1-11, 16.24-25)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를 이루신다. 그렇다면 뺄셈이란 이런 의미다: ‘, 그래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겠느냐?’

 

 

부스러기 묵상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10)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런 요나의 아직 앞에서도 묵묵히 일하신다.

아직 답지 못해도, 아직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도, 아직 사명과 소명을 따라 준비된 일꾼이 아니어도, 이미의 사랑을 받기에는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고 못난 자리에 있어도,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먼저 일하신다. 하나님은 먼저 당신의 것을 주신다. 하나님은 먼저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사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요일4.10). 이것이 바다 깊은 물 속에 요나보다 먼저 가셔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모습이다. 바로 이분이 요나와 요 나!’의 하나님이시다.

요나는 12절처럼 나를 끝내라!’라고 살아도 하나님은 17절로 찾아 가셔서 그를 만나주신다. 그를 17절에서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신다. 하나님은 모리아산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그곳에서 수풀에 걸린 한 수양을 이미 준비해 놓고서 그를 기다리셨다(22.13). 하나님은 리브가의 태중에 있는 아우 야곱을 이미 형 에서 보다 먼저 사랑하셨다(25.23). 하나님은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씻고 있는 나아만 보다 먼저 그곳에 가셔서 깨끗하게 된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셨다(왕하5.1-14).

하나님은 요나보다 앞서 이미 물고기를 준비하사 바다에서 그를 기다리고 계신다(17). 참으로 기막힌 섭리요 사랑이다. 뭐 하나 잘 한 것도 없는 요나다. 감히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며 타락한 선지자다. 사명을 버리고 감히 하나님께 맞짱을 뜬 요나다. 그런데 이런 못난이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그를 물고기 뱃속으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은 이미(already)지만 요나는 아직(not yet)임에도 말이다. 요나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을 만한 아무 자격이나 조건이 없음에도 하나님은 아버지의 가슴과 사랑으로 요나를 품으신다. 하나님은 바다 깊은 속까지, 그리고 물고기 뱃속까지 그를 찾아가신다. 이것이 동시에 요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마침내 요나는 물고기뱃속신앙훈련학교에 입학한다. 삼일삼야(三日三夜)는 과연 요나에게 어떤 의미의 시간이 될 것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길목에서 어떤 모습으로 다시 무대에 등장할 것인가. 이쯤해서 하나님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은 2장의 요나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정상적이다. 이것이 3일의 비밀이다.

때때로 오도가도 못하는 막다른 지점에 서 있게 하실 때 우리가 요나를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침묵의 3일이 시작된다. 이제는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 앞에 서야 할 결단의 순간이 왔다. 나의 삶이 요나처럼 일 때 그것은 하나님이 뭔가를 시작하시는 때이다. 3일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회개의 시간이다. 뉘우치고, 돌이키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회복할 시간이다.

물고기 뱃속에 있어도 하늘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금 왜 하나님이 나보다 먼저 막다른 길목, 물고기 뱃속에까지 밀려간 나를 바로 그곳에서 기다리고 계신가를 생각해야 할 때다. 그 해답은 이미 물고기 뱃속에서 시작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물고기 뱃속(절망, 고독, 고통, 질병, 실패라는 '지금 거기')일지라도 희망이다. 하나님 때문이다. 물고기 뱃속, 그 끝에도 하나님은 나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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