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영적인 법칙들(사 6.1-13)

20200717(양무리)

  

 

 

세 가지 영적인 법칙들

Isa. 6:1-13

 

  

   본문 관찰

 

      웃시야(아사랴, 왕하14.21, 15.1-7, 대하26.1-30)

      13여로보암통치 시작(41년 통치, 왕하14.23)

   16유다 10대 왕

   45(왕위 29) 아들 요담 태어남

      54(왕위 38) -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6개월 통치, 왕하15.8-12)

      55(왕위 39) - 살룸(1개월 통치, 왕하15.13-16)

                              - 므나헴(12년 통치, 왕하15.17-22)

      66(왕위 50) -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2년 통치, 왕하15.23-26)

      68(왕위 52) - 르말랴의 아들 베가(20년 통치, 왕하 15.27-31)

   68(왕위 52) - 죽음

      *나병이 걸리기 전에 아들 요담이 태어났을 것이다.

 

   요담(왕하15.32-36)

   23아버지 웃시야 죽음

   25- 유다 11대 왕(베가 2년에 왕위에 오름, 왕하15.32)

   41(왕위 16)

     

 

소명 억세스(access)

   

웃시야 왕이 죽든 해에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이다.

먼저 웃시야가 누구인가를, 그리고 그 시대의 영적인 모습을 살펴본다. 그의 죽음과 당시 유다의 영적 상황, 그리고 이사야의 소명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웃시야는 일명 아사랴’(왕하14.21)라고도 불리우는 유다 제10대 왕으로 부친 아마샤의 뒤를 이어 1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BC 793-53)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52년간 유다를 통치(BC 792-40)한 왕이다(대하26.1-23).

역대하 26장에 의하면 통치 초기에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하나님을 구하였다(4-5a):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5b) “하나님이 도우사”(7a) 그는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여 견고한 나라를 이루었다. 하지만 말년에는 교만함 때문에 화를 자초한 비극적인 왕이었다. 그는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나 육체로 마친 육에 속한 사람이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16)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문둥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별궁에 거하였다(17-23).

이사야의 소명을 전후한 유다의 영적 형편은 실로 가관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총체적인 부패요 타락이다. 그러고도 살아 있고, 그러고도 아직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이사야의 고발장을 보면, 죄악(1.1-4.1) 회복(4.2-6) 심판(5.1-30)으로 큰 흐름이 전개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과연 6장의 분위기는 어떠할까, 숨죽이며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놀라운 것은 이런 총체적인 타락과 죄악이 난무한 유다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의 세계를 보는 놀라운 일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 희망이 없던 유다에 희망은 하늘에서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 즉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삶의 세 가지 영적 법칙을 발견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순서에 있다. 이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뒤에서부터 역으로 밟아 올라올 수 없다. 따라서 진정으로 자신을 아는, 즉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사람만이 가능하다. 인간이 자신을 알고, 죄를 깨닫는 것은 연습훈련학습교육도덕윤리철학득도터득생득극기고행선행참선유전공로혈통과 같은 이 땅의 것으로부터, 혹은 율법을 지킴으로 시작되거나 이루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1법칙: 하나님()을 본다.

    *2법칙: 자신()을 본다.

    *3법칙: 사명()을 본다.

   

 

주 하나님을 보았다(1-4).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3a)

 

바로 이때에, 즉 죄에 따른 심판이 예고되고 있는 때에 이사야는 하늘 문이 열리는 천상의 어전(御殿, 보좌)을 본 것이다. 하나님은 저 영광스런 천상을 이사야로 하여금 보는 은총을 주셨다. 이사야의 소명(calling)은 여기서부터다.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위한 영적인 제1법칙은 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은 은혜다. 하늘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보좌를 여시사, 우리 인간 편에서 이야기하자면 이사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보좌를 보도록 해 주셨다. 여기서 인간 세상과 천상의 가장 대조적인 모습이 바로 거룩이라는 점을 주목한다. ‘거룩’(Holiness)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속성 가운데 하나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을 맛보았는가?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났는가? 또한 이 만남의 은총을 계속 유지하고,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나님 만나기, 아니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그 은총을 진심으로 열망한다.

하나님이 이사야를 부르신 것은 당신의 거룩이 유다 안에 다시 회복되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것은 거룩이라는 연결 고리만이 하나님과 유다 백성 사이를 다시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도 감동(기대)이 없다면 이것은 심각한 영적인 불균형이다. 영적 무감각은 가장 큰 질병이다. 빨리 치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료불가판정을 받게 된다. 신앙이 힘이 없고, 무능력하거나, 영적인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져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열망이 없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거나, 하나님과의 첫사랑을 잃어버리고 죄의 수렁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죄는 언제나 하나님을 멀리하게 만드는 독초와 같다.

   

 

자신을 보았다(5-7).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5a)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서 자신을 보자 이사야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인이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위한 영적인 제2법칙은 을 보는 것이다. 이렇듯 하늘을 본 사람은 자신을 본다. 그래서 은혜를 받으면 내가 얼마나 초라하고, 또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됨과 동시에 그것 때문에 통곡하게 된다. 이것이 은혜의 출발이다. 하나님을 만나 거듭나면, 다시 말하면 중생(重生)하면 회개가 터진다. 아무나 회개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기 때문에 거듭나고, 그래서 천상의 어전회의(御前會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 때문에 통곡했던 경험, 죄가 마음 아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이 주시는 사죄의 은총을 향해 몸부림쳤던 기억은 하나님을 만난 사인(sign)이며, 이 경험은 신앙을 늘 살아있도록 만든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는 처절할 정도의 자기 부정의 고백이 뒤따른다. (42.5-6), 베드로(5.8), 바울(7.21-25, 딤전1.15b)이 그렇고, 특히 다윗이 그러했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22.6, 51.5)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죄 때문에 뒹굴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단절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에 대해서는 절망하게 되어있다.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느냐라는 하나님과 인간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간격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자신의 죄와 무능력을 철저하게 인식한다.

하지만 위의 사람들도 그랬듯이 이사야의 절망(탄식)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 이후를 역시 섭리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였다. 죄사함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의 산물이다: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b) 이사야의 공로가 들어갈 어떤 부분도 없었다. 이것은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 행위, 도덕, 윤리, 선함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죄사함에 따르는 것은 영적 자유함이다. 이것은 기쁨으로 나타난다. 모든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은 더욱 더 우리 주님께 자신을 집중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타오르게 만든다.

   

 

사명을 보았다(8-13).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

 

이사야는 영광스럽게도 먼 처음에 천상의 성가대의 찬양을 들었다(3). 그리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는 사죄의 은총을 통해 마침내 자신의 정체(identity)를 발견한다.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를 위한 영적인 제3법칙은 을 보는 것으로 완성된다. 하나님은 죄인을 쓰시지 않고 그를 새롭게 고쳐서 쓰신다. 강퍅하고, 고집스럽고, 자기 밖에 모르는, 그리하여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이기적인 사람들을 그대로 쓰시지 않는다. 죄인을 회개시켜 정결케 하신 후에 마침내 그를 부르신다. 여기서 한 가지 영적 교훈을 정리하게 된다. 그것은 죄사함의 은총을 통과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소명 없이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사죄의 은총과 소명에로의 초대를 맛보지 못한 자들 때문에 언제나 교회가 시끄럽다. 무슨 일을 하긴 하는데 자꾸 부딪친다. 다른 사람 상처 주고, 눈에서 눈물이 마르지 않게 만들고, 그래서 그 사람만 나타났다 하면 모두 다 슬슬 그를 피한다. 그 사람 때문에 모두들 못살겠다고 아우성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그 사람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정작 자신은 문제 덩어리로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 치고 소위 돈 없고, 무식하고, 초신자거나, 직분 낮은 사람들이 아니다. 다 똑똑한 사람들, 돈 많은 사람들, 오래 믿은 사람들, 신앙생활 잘 한다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지금 정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을 찾고 계신다. 일반적으로 교회는 사람을 먼저 세우고 쓴다. 그리고 그가 변화되기를 기대하고, 이것은 그가 맡은 일 때문에, 그 일을 하다가 그 직분에 걸맞은 사람이 되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식을 지금까지 쓰신 적이 없다. 이처럼 먼저 직분부터 맡기니까 된 줄 알고 그 다음부터는 영적인 질서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양산해 낸 무자격 직분자들 때문에 얼마나 혹독한 후유증을 치르고 있는가? 일차적으로는 목회자 책임이지만, 서로들 쌘 직분 차지하겠다고 교회와 목사 앞에 얼굴 도장 찍은 사람들 책임도 간과할 수 없다.

교회가 건강한가, 정말 장래가 있는 살아 있는 교회인가를 아는 척도(尺度) 가운데 한 가지가 있다. 직분 싸움하는 교회는 미래가 없다. 직분이라는 사다리를 타기 시작하는 교회 치고 괜찮은 교회 본 적 없다. 하나님은 다르다. 정말 어떤 사람을 쓰고 싶으시면 때로 기다리고, 슬쩍 손가락으로 밀어 보기도 하고, 옆구리 콕콕 찔러 보고, 외곽부터 서서히 좁혀 오시기도 하고, 그래도 깨닫지 못하고 좌충우돌(左衝右突) 하면 직접 손을 대시기도 한다. 그러니까 빨리 깨닫아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사인(sign)을 눈치 채지 못하고 불평하고, 짜증내고, 하나님께 시위하고, 그래서 교회도 슬슬 휴학하고, 하나님 주위만 빙빙 돌다가는 이다. 혹시 하나님이 이처럼 대우(?) 하시면 빨리 깨닫아야 한다. 아하, 하나님이 내가 필요하신가 보다. 하나님이 매우 급하신가 보다. 나같이 볼품없고, 자격 없는 죄인을 연단하시니 황공하옵나이다’, 그리고서 더 납작 엎드려서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사람으로 준비되는 것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이사야는 자신을 보자, 드디어 밖이 보였다(8b)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적인 법칙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나님! 부족하지만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쓰시려거든 쓰시옵소서. 나를 드립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요, 그리하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고,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람, 그런 그가 진실로 대답하는 말이 이것이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지 않겠나이다. 이 세상의 것들을 위해서 살지 않겠나이다. 썩어질 육신의 것을 위해 살지 않겠나이다.”

하나님은 바로 내가 서 있는 곳에, 믿지 않는 시댁(친정)으로, 믿지 않는 남편에게 당신을 당신의 사람들을 보내셨다. 마치 죄와 심판의 대상인 유다에 이사야를 보내시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니까 사랑하라구요, 웃기는 소리 마세요. 원수 놈의 자식 때문에, 그 놈의 정 때문에 살지, ‘사랑그것 잊은 지 오랩니다. 이혼하자니 남부끄럽고, 살자니 지옥이 따로 없고, 이 멋없는 세상 하루하루가 모래 씹는 맛입니다.”라며 패인(敗人)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up) (in) (out)으로 이어지는 순서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과의 만남 없이는 나를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철저하게 절망한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소명에 충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직 자신의 소명(달란트, 사명)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한 사람이다. 사명자는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철저히 부적격자인가에 대해서 몸부림친다.

소명은 위로부터 온다. 자신 스스로가 자각하거나, 발견하거나, 세우거나, 만드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위로부터, 즉 말씀으로부터 주어진다. 그런데 이것은 죄사함이라는 구속의 문()을 통과한 사람만이 받을 수 있고, 그것을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16:24), 다른 말로 하면 한 알의 밀처럼 썩어 죽음으로 열매를 맺는다(12.24-26). 그럼에도 여기에 생명을 거는 것이 진정한 사명자의 삶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9-10)

  

       →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11a)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러나 거룩한 씨가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11b-13, 표준새번역)

 

하지만 소명은 만만치 않다. 이사야가 유다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맡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게 해도 하나님의 심판(1.1-4.1, 5.1-30)에 대한 선언은 결과적으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9-13) 때문이다. 유다의 포로기 예언(11-12, 5.13,26)은 한층 강화된다. 캄캄한 죄악의 흑암 속에서 찬란한 하늘의 영광의 빛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시지만 하지만 이사야는 이미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 심판의 물줄기를 돌릴 수는 없다. 비록 타락한 유다이지만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그 유다와 함께 하고 계심에도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친히 유다의 죄악을 국문(鞠問)하시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인 셈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파국인가. 아니다. ‘남은 자’(13)의 희망이 그루터기로 보존된다. 유다가 이방의 포로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죄에 대한 심판은 분명히 시행되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속에서도 아브라함(12.1-3)과 모세(19.5-6)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다. 참으로 소름끼치도록 놀라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죄를 싫어하시고 분노하시는가를 생각할 때다. 역으로 유다의 죄가 얼마나 무겁고 큰 것이었으면 하나님이 이처럼 행동하시겠는가.

이사야는 천상의 거룩을 본 것과 지상의 부패를 본 것 사이에 서서 소명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 얼마나 힘든 노정이었을까. 눈과 귀와 마음이 다 병들어 있는 유다를 홀로 품고서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까지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소명이 어쩌면 피하고 싶은 사명이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이사야에게서 목회의 그림을 본다. 어쩌면 우리시대가 이사야처럼 목회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하늘 영광 한 모금으로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목양(牧羊)하라시면 나는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사야의 소명이 왜 6장에 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영광과 고난의 이중주,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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