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로 가는 길(사 2.1-22)

20200712(묵상)

  

 

 

미래로 가는 길

Isa. 2.1-22

 

   본문 관찰

 

   말일에 임할 평화(1-5) - ()

   그날에 임할 심판(6-22) - 저주(詛呪)

   

 

그날이 오고 있다.

 

이사야는 좀 더 큰 그림을 그린다.

겨우’(조금, 1.8-9)에서 회복’(1.26)의 불씨를 살려내더니 이번에는 말일’(마지막 때, 2-5), 그리고 그날’(6-22) 임할 그러므로(1.19,24-27 2.1-4)와 그러나(1.20,28-31 2.5-22)를 좀 더 확장함으로써 받은바 말씀의 시야를 좀 더 넓혀간다. 하나님은 1장에서 이사야를 통해 유다의 미래를 향한 기초를 닦으시더니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저 멀리 있는 아직의 미래를 망원경으로 끌어 당겨서 여기가 포도원이었다는 것을 알리는 망대만 남은 겨우의 오늘을 사는 유다 백성들에게 보여주신다. 역시 미래로(未來路)1장처럼 두 지평으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과연 유다가 가는 길은, 동시에 나의 가는 길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일이다.

   

 

평화의 날(1-5):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4a)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며,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3b, 표준새번역)

   겨우 조금(1.8,9)

     → 사죄의 은총(1.18)

     → 회복(1.26)

       → 말일에 여호와의 전(2)

       → 율법 & 여호와의 말씀(3)

         → 평화(4):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5)

 

말일에임할 회복의 그날에는 현재의 죄(, 1.2-15)의 모습은 사라지고 만다. 하나님께서 처음과 같이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1.26) 하셨던 당신의 꿈을 성전(교회)의 부흥으로 그리시고 계신다.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의 교회에 수많은 민족들이 몰려올 것이다(2). 이는 그 옛날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성취되는 메시야 시대의 환상을 이사야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기도 하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b)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올 것이라는 꿈은 참으로 암흑과도 같은 유다의 타락을 질타하는 메시지와 더불어 주어지고 있음이 흥미롭다. 이것이 죄악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이다. 어둠에서 빛을 보시는 분,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그리하여 주께서 가르치시는 진리의 길을 따르리라는 온 민족들의 외침(3), 이것이야말로 메시야 시대의 도래를 밝히 보여주시는 환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진리의 말씀은 민족들 사이의 분쟁과 갈등과 전쟁을 잠재우고 마침내 평화의 시대를 열게 될 것이다(4). 하나님은 이사야가 현재 서 있는 혼돈의 1장에서부터 머나먼 회복의 미래에 이르기까지 오직 교회와 말씀을 통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변함없이 밝히신다. 생각해 보면 죄악에 대한 분노와 징계에 따르는 무수한 위기의 순간들이 넘쳐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오래 참으사 한결 같이 오직 교회를 통해, 그리고 오직 말씀을 통해 이 모든 일을 이루시겠다 하시니 놀랍고 황공할 따름이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평화. 이 일은 하나님이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실 것이다. 역사는 지금 바로 그 나라를 향해 가고 있다. 하나님은 사죄의 은총(1:18)을 통해서 이 거룩한 나라에 참예할 당신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계신다.

   

 

심판의 날(6-21): 주께서 주의 백성 야곱을 버리셨음은”(6a)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경고(6-11)

     동방 풍속(6)

     우상숭배(7-9)

     교만(눈이 높은 자, 11)

   우상숭배자들에 대한 심판(12-21)

     “임하리니 임하리니”(12-16)

     “그 날에 그 날에”(17-20)

 

그럼에도 왜 심판인가?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됨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세상은 이미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서 공개하신 그 나라의 일원이 되는 기회를 거부한다. ,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이방의 가증한 풍습들을 따르고(6), 우상을 숭배하며 피조물을 섬기는 일에 빠르고(7-8), 교만과 오만이 하늘을 찌름으로써(11) 하나님을 따라 사는 길을 버렸다. 이처럼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하고 거만하고 자고한 자들은 심판의 날을 필연적으로 맞게 될 것이다(12). 세상 그 무엇이 그 날의 옴을 피할 수 없으니(13-16), 이렇게 해서 거만은 꺾이고 거드름은 풀이 죽게 되고(17), 마침내 우상들은 다 사라질 것이다(18).

19-21절은 마치 홍수심판과 노아의 방주(6.13-8.19)를 연상하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노아가 살던 그 당시의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문이 닫히는 그 시간까지도 하나님의 언약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하늘을 바라보는 일에 실패하고 오직 땅의 일들에 분주하였다(24.37-39). 비가 오자 산 위로 올라갔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방주 위에 올라가 죽을 힘을 다 해 방주문을 두드리며 들어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문이 닫힌 이후에 그 나라의 잔치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25.1-13). 이렇듯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생을 의지한 자들의 처참한 꼴을 미리 보여주시는 이유는 뭘까.

마치 아무도 다리 밑에서 거지가 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현실은 엄연히 거지로 살다가 거지로 마치는 인생이 있듯이 이처럼 미리 경고의 나팔이 울리는데도 셀 수 없이 많은 인생들은 지금도 지옥으로 가는 길을 따라 화려한 외출을 즐기고 있다. 이사야 예고편은 이미 실제가 되어 우리시대를 가르는 또 하나의 길이 되어 있다. 이를 어쩔 것인가.

   

 

부스러기 묵상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3.9)

 

미래로 가는 길이 활짝 열려 있다.

하지만 이 길은 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으로 왕래하는 두 길이다. 이 길은 이사야도 예고하듯이 결과는 하늘과 땅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狹窄)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7.13-14)

하나님은 다 용서하시는데 오직 우상숭배만은 물러서시지 않으시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신다(6-9). 피조물이 창조주를 잃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만큼은 하나님이 견디지 못하여 하신다.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한 것은 용서될 수 있어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세상의 것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이야말로 스스로의 파멸을 자초하는 자살행위일 뿐이다.

영원한 평화와 심판으로 그려지는 주의 날은 이처럼 긴장 속에 놓여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마치 고속도로에서 속도위반을 단속하는 -위반한 사람을 찾아내어 벌금을 주기 위해 숨어 있는- 경찰처럼 일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주님은 심판의 날을 예비해 놓고 거기에 걸려들 민족들과 사람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직저 미래로 가는 길을 이렇듯 이미공개하신 것이다. 그것도 유다가 정신 차리고 잘 살 때가 아니라 좌충우돌(左衝右突) 하고 있을 때에 회복으로 가는 길을 열어 놓으시면서 동시에 심판으로 가는 길을 조심스럽게 보여주셨다. 이미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을 목도한 유다로서는 자신들 역시 안전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긴장이 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의 고발장에서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이미 유다 역시 죄악이 관영한 타락의 땅이 된지 오래였다. 이러한 때에 선지자의 등장은 여러모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때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그대로 폭로하시면서 동시에 이들을 향한 회복의 소망을 약속하신다. 이는 죄에 대한 최종적인 메시지가 심판이 아니라 다시금 바른 삶으로 나아오도록 촉구하는 기회임을 알리는 하나의 사인인 셈이다. 그리고 이처럼 여전히 답지 못한 유다를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품고 가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으로도 보여진다.

주님은 파국으로 끌고 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아직 기회는 있다. 지금은 겸허하게 주님의 목소리를 청종할 때다. 유다의 미래에 대한 거시(巨視) 지표는 밝고 긍정적이다. 문제는 유다가, 동시에 내가 이 기회를 어떻게 복()으로 이끄느냐에 있다. 한층 책임은 더 무거워졌다. 은혜가 늘 그런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여러모로 드는 2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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