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의 눈으로 유다를 본다(사 1.1-9)

20200710(묵상)

   

 

 

이사야의 눈으로 유다를 본다.

Isa. 1.1-9

 

   본문 관찰

 

   유다 왕 웃시아 요담 아하스 히스기아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이사야(Isaiah)는 누구인가?

 

예루살렘에 살던 왕족 출신의 선지자로서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이다.

그는 웃시야가 죽던(6.1) BC 739년경에 예언하기 시작하여 BC 701년경 앗수르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해 올 때까지 등장한다. 유대인의 탈무드 전승에 따르면 그는 므낫세의 치세 기간에 톱으로 켜서 죽임을 당한다(11.37 참조). 아모스의 아들로서 여선지자와 결혼했으며(8.3), 두 아들이 있었다(7.3, 8.3).

한편 미가와 동시대 사람으로(1.1, 1.1), 둘 다 유다에서 일했으며, 북왕국 이스라엘 왕국에 전력을 다했던 아모스와 호세아보다는 앞선 사람이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는 4대 왕에 걸쳐서 약 40년간을 설교한다(왕하15-21, 대하26-32장 참조). 그는 앗수르 왕국이 팽창해 가고, 그 결과 이스라엘이 멸망해 가는 과정에서, 이스라엘과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구속을 예언한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는가? 먼저 웃시아(Uzziah, 대하26.1-23) 왕이 죽자 유다도 쇠퇴기에 들어섰고, 이와 더불어 앗수르가 침략하고 유다는 사회적-종교적으로 순수성을 잃게 된다. 요담(Jotham, 대하27.1-9)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 아하스(Ahaz, 왕하16.1-18, 대하28.1-27, 7.1- )는 이스라엘과 수리아가 유다를 침공했을 때 이사야의 권면을 따르지 않고 앗수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는데(7.1- , 왕하16.7- ), 이로 인해 그는 앗수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왕하16.2b), 우상숭배를 권장했고, 성전의 문을 폐쇄했으며, 자기 아들을 제물로 불태웠다. 히스기아(Hezekiah, 왕하18.1-20.21, 대하29.1-32.33)는 탁월한 신앙의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개혁(대하29.3- )을 통해 복구된 성전에서 진정한 예배를 드리도록 재확립시켰으며, 유월절 의식을 웅대한 규모로 재개하였고, 이방의 산당을 제거하였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2-7).

 

이사야는 하나님이 보여 주신 이상, 곧 설교를 통해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 한 왕에서 또 다른 왕으로 역사는 이어졌지만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변함없이 말씀하셨다. 그는 외쳤으며, 몸부림쳤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그 곳에 묵묵히 서 있었다. 그는 천지(天地, 2)를 증인 삼아 하나님의 법정에 피고(被告) 유다와 예루살렘을 고발한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이사야는 먼저 유다의 상태(형편)를 밝힘으로써 무엇이 이들을 이처럼 만들었는가를 좀 더 주목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주인을)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3b)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여호와를 버리며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4)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5b)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6a)

   “황폐하였고 불에 탔고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같이 황폐하였고”(7)

 

놀라운 것은 유다의 타락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이 친히 양육하였는데 당신을 거역하고(2) 죄로 부패했을지라도(4) 그럼에도 여전히 유다와 부자(父子) 관계를 유지하신다. 이렇듯 하나님은 변함없이 아버지시다(2,4,8). 문제는 유다다. 하나님은 유다가 이렇게 된 원인을 말씀하시기 전에 머리에서 발끝까지 병든 이들의 상태를 밝히심으로써 유다가 지금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깨닫도록 하신다. 아버지를 버린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유다를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다시 찾아오신다. 자식의 불효(不孝)를 부모의 사랑으로 다시 한 번 더 덮고 계신 하나님의 깊이와 넓이가 눈물겹다.

 

 

포도원의 망대같이 겨우 남았도다(8-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다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9)

 

온 천지(天地, 2)에 공고된 유다의 죄상과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포도원의 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이제는 황무한 땅으로 변해버린 유다의 벌판에 포도원의 망대 같이펄럭이고 있는 흔적이 주는 뉘앙스가 비수처럼 심령에 박힌다. 저곳에 포도원이었다는 흔적만이 겨우 남았도다는 자막이 흐른다. 어제의 영광이 오늘의 황무함으로 순식간에 변해버린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유다의 현실이다. 불타버린 집을 뒤로하고 겨우 몸만 간신히 살아 남은 자의 모습처럼, 그렇다면 저 불타는 곳이 내가 살던 열 두 칸짜리 저택이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이사야의 눈에 비친 유다의 모습은 이처럼 흐리고 칙칙하다.

그러나 완전히 진멸시키지 않으시고 겨우’(조금) 남겨 두신 것이 은혜다. 유다는 바닥을 쳤고, 하나님은 여기서부터 이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게 유다의 희망이다. 온 세상이 죄로 물들었지만 노아를 남겨 두신 것처럼, 한 사람 아브라함을 남겨 두시사 믿음의 계보를 이어오도록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지금도 타락한 인류 안에 당신의 사람(나라)들을 겨우 남겨 놓으심으로써 세상을 향하신 당신의 사랑이야기를 멈추시지 않으신다.

범죄한 유다를 보시며 망연자실(茫然自失) 해 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의 몰락을 보시면서 탄식하시는 하나님, 부자(父子)의 관계가 끊어질 듯하면서 겨우남은 서먹서먹함, 범죄한 유다를 다시 고치기 위해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신 하나님, 포도원의 망대임을 알리는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하나님을 생각한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이 유다를 다시 찾아오심은 희망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심판의 메시지가 아니라서 일단 안심이다. 나 역시 죄인이어서 일까. 자신의 죄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의 반응에 일단 민감할 수 밖에 없는 나 자신의 죄상(罪狀)을 본다. 나의 현재를 진단해 주신다는 것은 이처럼 되어버린 나의 과거를 모르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면 또한 나의 과거 역시 한 눈에 꿰고 계신다는 것 아닌가 싶다.

이왕 치료(회복)를 시작하신다면 나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밝혀져야 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수순이다. 좀 부끄럽고 수치스럽지만 다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처절한 외침이라면 이것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수의(壽衣)가 아닌 환자복(患者服)을 입고 있으니, 그것도 최고의 명의(名醫)이신 하나님과 그의 병원에서, 유다의 전문의(專門醫)인 이사야를 통해 말씀치료가 시작되었으니 희망이다.

나의 죄와 허물을 소돔처럼 갚지 않으시고 조금 남겨 두신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하나님은 유다처럼 나 또한 포기하지 않으셨다. 죄로 가득한 현재임에도 말이다(2-8). 유다를 보시며 탄식하시는 하나님이 동일하게 나를 인하여 아파하시는 것을 느낀다. 내가 나를 보아도 실망스럽고 한심한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오죽할까. 한 사람의 성도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입은 목사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빠로서, 나 역시 자식으로서 온 몸이 병들었고 성한 곳이 없지 않은가. 죄가 나를 향해 어김없이 대공습을 시작해 왔고, 나는 여지없이 그것의 표적이 되어 휘청거린다. 나에게는 유다의 죄악을 향해 돌을 들 힘마저도 없다. 그럴 만 한 자격도, 거룩함도, 능력도 없음을 인하여 빈 손 들고 항복한다.

이사야의 눈으로 나를 본다. 내가 죄인이라는 깃발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음이 희미하게 보인다. 그래, 아직 그렇게라도 살아있음이 눈물겹다. 여기서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 마음이 동나기 전에, 아직 하나님의 소리가 들릴 때, 주님이 조금 남겨 두셨을 때가 희망이다.

하나님이 그래도 나를 이처럼 대접해 주시니 감사할 뿐이다. 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보는 이 기막힌 역설 앞에 선다. 이사야가 오고 있다. 내 마음을 열고 그의 찾아옴을 겸허하게 맞이한다. 그를 통해 나를 보고, 하나님을 볼 수 있음이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코로나 재난의 길목에서 이사야를 만난 것이 퍽이나 다행스럽다 싶다. 참으로 적절한 때에 이사야 앞에 세워주신 하나님께 다시금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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