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4-15(묵상)
일하시는 하나님
Isa. 65.1-25
본문 관찰
하나님의 진노(1-16)
패역한 백성들의 심판(1-7)
나의 종들의 구원(8-16)
구 원(8-10)
심 판(11-12)
구원과 심판의 이중주(13-16)
하나님의 창조(17-25)
응답 앞에 서서!
이사야의 기도(63.15-64.12)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만 한 형편과 처지가 아니었다(1-7).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 여기 있다.”(1b)시며, 배은망덕한 백성들을 향해 종일 손을 벌리신다(2). 이로써 죄에 대한 심판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내가 갚고야 말겠다. 내가 모두 보응하겠다!”(6b,7b) 왜 그런가?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고(11), 하나님이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12)기 때문이다. 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 멸하지 아니하고”(8b)로 시작되는 ‘나의 종들’에 대한 회복의 약속이다(9-10,13-16). 그래서 이들이 누구인가에, 동시에 하나님이 왜 이들에게 은혜(회복)를 약속하시는가를 주목하게 한다. 다 알고 계셨기에, 마침내 심판 받을 ‘너희’(1-7,11-12)와 회복될 ‘나의 종들’(8-10,17-25)에게 각각 심은 대로 거두는 방식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절묘한 이중주(13-16, 갈6.7-10 참조)를 대하게 된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만난다. 미래는 이렇듯 두 얼굴이다. 이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 본문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그렇다.
하나님의 진노(1-16)
하나님이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2b)의 파트너는 누구인가? 또한 이처럼 패역한 자리에 있었음에도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1a)며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이스라엘은 죄행(罪行) 가운데 깊숙이 빠져 있었으니 하나님께 묻지도, 하나님을 찾지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1).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이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런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2) 찾아오신다. 그렇다면 이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한편 하나님의 사랑의 찾아오심을 거부한 자들을 향한 심판의 이유들이 하나 둘 밝혀진다(3-7). 삶은 마치 온 몸에 암세포(癌細胞)가 퍼져 있는 것처럼 처참하게 무너졌는데 다름 아닌 입 하나만은 걸작이다: “멀찍이 서 있어라, 우리는 거룩하니, 너희가 우리에게 닿아서는 안 된다. 가까이 오지 말아라.”(5) 그야말로 두 얼굴의 사나이다. 아, 결국 겉과 속이 다른 우리 또한 이 말씀에 자유로울 수 없지 않은가. 어찌할까!
우상숭배로 시작하여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교만한 죄(2-5,11-12)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심판, 6-7)은 “칼에 죽는 신세가 되게”(12a; 15b 참조) 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 종들’과의 분명한 차이를 똑똑하게 목도하며 수치를 당하는 것으로 집행된다(13-16). 하지만 절묘하고 놀라운 것은 이 와중에서도 “나의 종들을 생각하여, 그들을 다 멸하지는 않겠다.”(8b)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심판과 은혜를 양 손에 각각 잡고 계신 하나님, 그분을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나의 종들’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죄의 씨앗을 인생(이스라엘)이라는 밭에 심음으로써 심판이라는 추수를 당하게 된(될) 자들이 아닌, 즉 죄의 보응에 따른 멸망으로부터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보호 받게 될 자들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서 야곱과 유다의 유업을 이에 살게 할 ‘택한 사람들’(9), 그러니까 ‘나를 찾는 내 백성’(10)을 내실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당신의 종들은 이제 먹고, 마시며,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노래를 부를 것이다(13-14). 이것은 죄를 기억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지난 날의 괴로운 일들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않고, 지나간 과거를, 내가 다시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16b)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꺼지고 은혜의 빛이 찬란하게 빛나게 된 것은 하나님이 과거의 죄를 기억지 않으시고 오늘을 복(福)되게 하셨기 때문이지 이스라엘이 뭘 잘해서가 아니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느끼는 대목이다.
하나님의 창조(17-25)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한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17-18a)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그 날을 앞당기도록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날에 하늘은 불타서 없어지고, 원소들은 타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을 따라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벧후3.12-13)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계21.1)
마침내 어두운 지난 날의 환난은 잊혀졌고 또 숨겨져 버렸기 때문에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다. 무질서한 옛것들은 다 지나가고, 마침내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새로운 질서를 따라 하나님의 종(백성)들이 펼쳐가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한 행복을 누리는 새 세상이 올 것이다. 이것은 이사야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내가 …”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선포(결정사항)다.
“그들은 주께 복 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23b)
하나님은 “내가 야곱에게서 자손이 나오게 하며, 유다로부터 내 산을 유업으로 얻을 자들이 나오게 하겠다. 내가 택한 사람들이 그것을 유업으로 얻으며, 내 종들이 거기서 살 것이다.”(9)라는 언약을 성취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는 창조의 회복이 이루어지는(25) 질적 회복을 넘어선 완성을 목표로 한다. 또한 이것은 메시야의 예언과 성취를 지난 종말론적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미래는 활짝 열려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면 현재의 고통과 절망이 미래의 희망과 영광으로 역전된다는 주님의 선포가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한다. 이스라엘은 지금 자신들의 만신창이(滿身瘡痍)된 현실의 원인을 알았고, 이제 그것으로부터 돌아설 수 있는 새로운 길도 안내를 받은 셈이다. 이제 저들이 할 일이란 이전 것은 기억되지도 않을 새 하늘과 새 땅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다른 신들을 하나님을 대하듯 섬기며 살아가는 죄악의 사슬을 끊고, 지금이야말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아멘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하는 길이다.
부스러기 묵상
“이 모든 것이 내 앞에 기록되어 있으니”(6a)
이스라엘의 죄악만 기록되어 있을까.
아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 또한 하나님 앞에 다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날마다 늘어나는 것은 죄니 이를 어찌할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따른 용서와 사랑이 아니었으면 우리 역시 죄악로(罪惡路)에 서 있는 이스라엘처럼 멸망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우리의 코엔 호흡이 남아있으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해부하시듯 우리의 죄과를 그렇게 밝히 드러내신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은 고사하고 우리의 지금의 모든 삶의 자리에마저도 결코 서 있을 수조차 없을 것이다. 늘어가는 것은 죄(罪)니까. 나이 만큼 묵은 죄인이니까...
하나님께 놀라는 부분은 이것이다. 이미 회생 불가상태에 빠진 이스라엘에서 아직 희망인 ‘나의 종들’을 구별해 내신다는 점에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희망의 미래로 가시겠다 하시는 부분에서다. 결국 하나님이 고칠 수 없는 병은 없질 않은가.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얘기가 아닌가. 하나님은 지금도 마른 나뭇가지에서 새 순을 띄우시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지 않은가. 이렇듯 언제나 희망은 하나님 편에서 온다. 이것이 죄악 덩어리인 자신을 품고 주님 앞에 서 있는 죄인 김충만의 유일한 희망이다.
“아, 하나님, 내 속에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 주시고
내 안에 정직한 새 영을 넣어 주십시오.
주님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거룩한 영을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말아 주십시오.
주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기쁨을 내게 돌려 주시고,
너그러운 영을 보내셔서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시51.10-12)
이 시는 “다윗이 밧세바와 정을 통한 뒤에, 예언자 나단이 그를 찾아왔을 때에 뉘우치고 지은 시”(시편 51편) 가운데 한 대목이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죄인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죄인이기에 죄를 범한다. 그렇기에 문제는 범죄한 이후가 더 중요하다. 다윗은 이미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호소할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염치 불구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온 몸과 맘으로 무릎 꿇는다.
지금 이스라엘은 물론 우리게 필요한 것은 이 부분이다. 체면이나 염치가 밥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더더욱 하나님 앞에서는 말이다. 다시금 은혜의 주님 앞에 나아간다: “빈 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찬송가 494장 3절) 이스라엘에게 내일이 있었다면, 그렇다면 우리게도 미래는 있다. 이 은혜를 무엇을 갚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