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광 앞에 무릎 꿇고!(사 63.15-64.12)

20210813(묵상)

 

 

 

그 영광 앞에 무릎 꿇고!

Isa. 63.15-64.12

 

    본문 관찰

 

    이스라엘의 현실(63.15-64.7): 진 단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64.5)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64.6b)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64.7a)

    그러나 여호와여!(64.8-12): 처 방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64.8b)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64.9a)

 

        [구조]

        돌아오시옵소서(63.17b): 하나님의 부재(실상)

            이스라엘

        강림하시고 강림하사(64.1,3a): 하나님의 임재(소망)

 

 

현실 앞에 서서!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품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저희는 그 옛날 출애굽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그러나라는 반역으로 반응했고(63.9b), 그 결과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63.10). 놀라운 것은 그 이후다. 백성들은 옛적 모세의 때를 기억하여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있고(63.11-14), 동시에 선지자 역시 이 암울하고 참담한 현실 앞에 서서 하나님께 호소의 기도를 드린다(63.15- ). 이사야에게서 목자의 마음, 중보자의 심령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지금 이스라엘의 그러나’(63.9b)를 하나님의 그러나’(64.8a)로 바꾸기 위해 눈물어린 기도를 통해 엎드려 호소한다. 메시야의 영광과 빛을 본 사람은 이처럼 살아야 되지 않을까. 이사야가 그랬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희망임을 알고 믿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이스라엘의 현실(63.15-64.7): 진 단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63.16a,16b, 64.8a)

    여호와여 돌아오시옵소서!(63.17)

 

선지자의 절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멈춰버린 것 같은 이스라엘의 현실을 보는 것에서 시작되지만, 그러나 이 절망에 찬 탄식을 기도에 담아 토로하는 거룩한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63.15).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하나님은 부자(父子) 관계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63.16) 동시에 예로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구원자)’이심을 고백한다. 놀랍고 놀라운 고백이다.

흔들리고 있는 이스라엘, 아니 이미 흔들려버린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만은 변함없으신 아버지요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는 선지자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인생이 결국에 기댈 수 있는 언덕이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그 자리는 절망이 아니라 이미 희망이 싹트고 있는 순간이다. 이사야의 눈은 벌써 저만큼 가 있다. 이 단계에서 이스라엘을 비난하고 공격한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의 마음과 토해내는 가슴의 울렁거림에서 목회자와 설교자와 목자의 마음을 읽어본다.

그뿐 아니다. 그는 지금 일그러진 이스라엘의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포기하지 않는다(63.17). 주의 길을 떠나서 강퍅하게 되어 결국 주를 경외하지 않게 된 이스라엘이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이 떠나신 것, 그러나 선지자는 이 문제의 해법을 하나님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돌아오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죄는 이스라엘이 지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떠나셨고, 그러자 이스라엘은 성소를 유린당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63.18), 하나님의 통치권 안에 있지 않은 것처럼 된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된 민족처럼 되어 버리고 말았다(63.19). 그야말로 총체적 몰락이다.

 

    “주께서 기쁘게 공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64.5-6)

 

죄의 비참함이라는 게 이런 것일까. 선지자도 알고 있듯이 이미 이스라엘은 회복이 불가능한 절망 상태다. 이사야는 얼마나 고독했을까. 자신이 외친 그 많은 설교들을 듣고도 이스라엘은 죄로부터 돌이키지 않았으며, 주의 진노에 의해 몰락(멸망)해 가고 있음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지금 이 모든 죄를 홀로 자백하며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다름 아닌 쏟아지는 이스라엘을 향한 세상의 비난과 욕설이다(64.2). 더 이상 이스라엘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렇다면 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것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선지자의 기도 안에 들어있는 절박함이다(64.1). 여기서 선지는 모세 시대를 기억해 낸다(64.3-4). 하나님은 죄가 가장 깊게 작용할 때 당신의 거룩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 보이시지 않았는가. 죄악을 정죄하고 심판하심으로써 당신의 의()를 찬란하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 출애굽기의 하나님이시다. 지금 포로기의 이스라엘에게도 이 하나님이 강림하셔야만 한다. 희망은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여!(64.8-12): 처 방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63.16a,16b, 64.8a)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64.9b)

 

이사야의 신학은 참 건강하고 맑다. 비록 이스라엘이 탕자처럼 방황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아버지시다는 고백에서 그렇다(64.8). 그러므로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 진흙인 이스라엘은 다시 자신을 온전히 맡겨야만 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인공품(人工品)이 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시 새롭게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신공품(神工品)이 되기를 열망하는 이사야, 그의 집요한 기도의 몸부림에서 아버지 앞에 무릎 꿇은 아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그의 기도는 절정에 다다른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64.9) 못났어도, 죄악에 찌들었어도, 하나님의 길을 떠났어도, 주의 진노하심 아래 있어도, 성소가 유린 당하였어도, 쇠패한 잎사귀 같아도, 주를 부르는 자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의 분노를 그쳐 달라는 탄원을 토로하는 이사야에게서 중보기도의 깊음과 넓음을 본다.

주의 거룩한 성읍들(시온, 예루살렘, 64.10), 우리 조상들이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폐하였나이다”(64.11)라는 것은 곧 이 상태에서는 주를 찬송하고 즐거워하는 삶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전 삶으로 다시 돌아가려면 하나님께서 잠잠하지 않으시고 다시 이를 회복하시는 길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64.12).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끝끝내 참고 잠잠히 계시겠느냐는 기도의 마무리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향()이 되어 올라가고 있음을 본다.

   

 

부스러기 묵상

 

아름다운 추억(64.3-4,10-11)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다시 돌아갈, 그래서 회복될 기회를 붙들 수 있는 은혜의 부스러기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이처럼 절박한,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호소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도 바로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출애굽하였으나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하나님의 진노에 불을 당겼던 이스라엘이 비록 40년 후라고는 하지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지금 포로기를 예고 받고 있는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다. 가나안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다시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사야가 기도로 호소하면서 믿고 있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자칫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에서 힌트를 찾은 선지자는 이번에도 포로기를 끝내는 길, 다시 가나안(예루살렘, 시온)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은혜의 창()을 통해 바라본다. 놀라운 것은 이것은 기도라는 통로를 통해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음이다. 이렇듯 선지자는 지금 이스라엘을 온 몸에 품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 시작(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찾고 구할 수 있는 것이 주는 안정감과 은혜는 실로 크다. 지금 이스라엘이 그러하고, 특별히 신약의 탕자가 그랬다. 비록 지금(오늘)이라는 시간표는 엉망으로 점철되어 있을지라도 다시 새 순이 돋을 수 있는 그루터기가 남아있다는 것, 그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다. 선지자가 호소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이들에게 이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곰곰이 묵상하면서 동일한 은혜의 분깃을 기억하게 된다.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그래서 다시 회복의 복을 얻게 된다는 것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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