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8 - 요나 콤플렉스.complex(욘 4.1-5)

20210214(양무리교회)

  

 

 

요나 콤플렉스(complex)

Jon. 4.1-5

  

 

    본문 관찰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요나 - 성인아이

 

신앙은 좋은데 생활은 아니올시다!’라는 말을 흔히 듣는다.

요나에게서 이런 조짐이 보인다. 그의 신앙고백은 참으로 놀라운 정도로 성경적이다(1.9, 2, 4.2). 그러나 4장으로 넘어오면서 무엇인가 좀 다른 모습을 보인다. 310절처럼 일하시는 하나님께 감히 인간의 위치를 넘어서는 태도로 대들고 있는 것에서다. 과연 요나는 또 뭐가 문제길래 다시 1장의 병이 도진 것일까.

   

 

요나의 어리광(1-3,5): 요나의 생각 > 하나님의 생각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6.12,14-15)

 

모든 일이 잘 되었다. 요나 자신은 1장의 불순종을 버리고 3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한다. 그 결과로 니느웨는 진실한 언행을 통해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3.10)심으로써 니느웨의 변화를 사랑으로 수용하셨다. 이제 모든 일은 잘 되었다. 만약 요나서가 3장으로 끝났다면 말이다.

 

    ▪요 나: 불순종 - 심판 회개 - 용서

    ▪니느웨: 죄악(악독) - 심판 회개 - 용서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이러한 언행에 제동을 걸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선지자 요나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1, 표준새번역) 그는 감히 310절의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고 이처럼 반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선 요나의 이러한 언행은 다음 몇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① 하나님을 위해 일하면서도 하나님과 생각이 다르다.

    ②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다르다.

    ③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못마땅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④ 하나님이 자기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쉽게 분노한다.

    ⑤ 하나님이 나와 다를 때 너랑 놀지 않을거야!’라고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고집을 부린다.

    ⑥ 하나님보다 자신의 생각이 더 우선이다.

    ⑦ 하나님의 용서를 나는 받았지만, 그러나 너를 용서하는 것은 싫다(원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내 이해와 생각과 다르게 진행될 때 쉽게 요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신을 기준에 놓고서 거기에 하나님이 벗어났다가 생각할 때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요나의 어리광을 선택한다. 요즘같이 4장의 요나형과 같은 성도들을 양산해 내는 때가 또 있었을까 싶다. 이상하게도 신앙이라는 게 수 틀리면 하나님을 향해서도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1) 따지고 들 수 있고, 언젠가부터 하나님은 그래도 되는 분으로, 그래서 4장의 요나처럼 살아도 괜찮은 것처럼 은연중에 우리네 신앙의 분위기가 그쪽으로 가 버렸다.

“40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4) 외쳤는데 그만 니느웨 백성들이 악행(惡行)에서 돌이켜 떠나 회개하고, 그러자 하나님도 재앙을 내리지 않으시고 저들을 용서하신 것을 목도하면서 요나는 1절처럼 반응한다. 그러나 그래서는 곤란하다. 그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다시 찾은 목자의 심정으로 잃었다 찾았다 기쁘다처럼 기뻐하고 즐거워했어야 한다(15.1-7). 하지만 그는 탕자의 형처럼 잃었다 찾았다 슬프다로 반응한다(15.25-32). 이게 다 하나님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때 하나님을 이상한 분으로 생각해 버리는 사람들의 심각한 오류들이다.

요나는 니느웨가 용서 받는 게 싫었다. 때문에 요나는 하나님이 310절처럼 하실 것이라는 것을 이미 12절에서 말씀드렸다고 말한다. 그래서 서둘러 다시스로 달아났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니까 요나는 처음부터 니느웨로 가는 것을 싫어했고, 더 깊은 이유는 만약 저들이 3장처럼 반응한다면 하나님께서 혹시 310절과 같이 응답하실 텐데,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는 이러한 일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그래서 1장처럼 언행했노라고 자신의 심정을 밝힌다.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고도 선지자인가. 이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다는 말인가.

그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에 따른 신앙고백(신학, 2b)은 거의 완벽하다. 하지만 그의 삶은 반대로 '아니올시다!‘이다. 1-3장까지의 무수한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어찌된 게 그의 신앙 성장과 성숙은 까마득하다. 결정적일 때는 하나님 따로, 자신 따로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니느웨 행을 거부했고(1.3, 4.2), 하나님이 하라 하시니까 하기는 했지만 역시 자기 뜻과 반대로 일 처리를 하시는 하나님께 상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는 자, 그것도 이를 기도라는 거룩한 형식을 쫓아 무릎을 꿇은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있다.

하나님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고, 그것이 좌절되자 분노하고, 그래서 하는 말이 나도 그럴 줄 알았다느니, 이제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음이니이다!”(3)라며 죽기를 원하고 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요나처럼 좌충우돌(左衝右突)하는 식으로 할 말 다하고, 하나님과 절교를 선언할 정도니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교회도, 직분도, 사명도 나 몰라라 하면서 지내는 것, 그러면서도 전혀 영적인 자각도 없이 기도하며 신앙생활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삶, 이게 요나의 영적 현주소다.

요나가 얼마나 간 큰 사람이냐면 하나님이 4절에서 약간의 힌트를 주셨는데도 5절처럼 반응한다. 이쯤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보고, 하나님을 보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하심을 보았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고작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그러니까 과연 니느웨가 자신이 선포한 메시지대로 멸망할 것인가, 아니면 40일이 지나도 하나님은 310절을 고집하실 것인가를 보겠다는 식이다.

그는 기도 후에도 변화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뜻을 구한 기도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다이얼에 자신을 맞추겠다는 순종을 연습하는 기도가 아니었고, 더욱 하나님의 뜻과 자기 생각이 상충될 때 하나님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결단의 기도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그의 기도는 그의 성장과 성숙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였다. 가히 신앙 따로, 생활 따로다.

   

 

하나님의 생각(4): 하나님의 생각 > 요나의 생각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29.11)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10)

 

    ▪모세 스타일 하나님을 알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어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1-32)

 

하나님은 요나에게 지금 이 경우에는 성내는 것이 아니라고, 지금 요나의 언행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의 생각을 요나에게 통보하신다. 1장에서 하나님은 폭풍행전’(1.4)을 통해서 요나를 깨우치셨는데 이번에는 조용히 말씀으로 요나의 생각을 교정하신다.

중요한 것은 이 대목이다. 나의 가는 길에 미끄러졌을 때, 내 생각만을 고집하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경거망동(輕擧妄動)하고 있을 때, 바로 그 때 조용히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뭔가 내 안에서 분노가 일어날 때,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고, 뭔가 모르게 영적 시계(視界)가 흐려질 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나의 생각은 망막할 때 그때가 바로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따르도록 그렇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할 때다.

   

 

부스러기 묵상

 

    ▪요나 스타일 - 하나님을 오해하다.

    ∙한 달란트 맡은 종 -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19.21)

    ∙사두개인들 -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2.29)

 

요나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여지없이 추락한다.

모든 일이 자기 마음 먹은대로, 자기 생각대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여기에 하나님도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이쯤되면 중증(重症)이다. 하나님께 이 정도니 영적 리더십에는 말 할 것도 없고, 자신과 걸리적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불을 보듯 뻔하고, 그러니 지내는 사람마다 충돌하고 아우성이다.

신앙은 요나처럼 자기 직성대로 할 수 있는 무대가 아니다. 나와 다르면 틀렸다고 생각하는 이 못된 죄의 근성을 버리지 않는 한 요나형 성도의 모델은 언제나 공동체를 멍들고 상처나게 한다. 요나처럼 사는 사람이 크게 자기 잘못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떠난 것도, 신앙의 여러 형식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여전히 기도하고 있고, 변함없이 맡은 사명들을 붙들고 있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별 문제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별히 이런 사람은 도적적으로나 윤리적으로 크게 잘못된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요나처럼 살고 있으면서도 예배도 드리고, 헌금생활도 하고, 봉사도 하고, 이런저런 교회 일들에 참여도 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계기가 되어 겉으로 돌출하지 않는 한 모범적인 성도로 오인될 수 있다. 이것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이제는 예의도 있고, 자기 감정도 조절할 수 있고, 자기 이해관계와 대립되지 않으면 고분고분하고, 적당하게 처세할 줄도 아는, 그러면서도 요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는 것, 이것은 분명 영적 위기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성도는 있을지 몰라도 영적이고 신앙적인 그리스도인은 많지 않다는 점이 위기다.

교회는 이런 요나 같은 사람들로 점차 가득 차고 있는 것 같다. 과연 하나님은 이 버릇 없는 요나를 어떻게 치료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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