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4 - 왜 물고기 뱃속에 넣으셨을까?(욘 2.1-10[1])

20201108(양무리교회)

 

 

 

강해4_ 왜 물고기 뱃속에 넣으셨을까?

Jon. 2.1-10

 

 

   본문 관찰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1-4)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5-6)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7-9)

   여호와께서(10)

  

 

물고기뱃속기도학교

 

모두가 다 하나님께 순종한다.

바다와 폭풍(4,15), 선장과 무리(14,16), 제비뽑기(7), 그리고 큰 물고기(17)도 그랬다. 하지만 오직 선지자만이 작심하듯 점점 불순종의 깊이를 더해간다. 마침내 죽음을 선택한다. 이방인은 물론 자연과 생물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요나만이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자신이 선택하고 결정한 것에 의해 죽는데도 말이다. 그는 생명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서야 마침내 이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도 물고기 뱃속에서 말이다.

   

 

기도자(Prayer) 요나

 

요나는 선지자의 새로운 사명을 받는 자리에 서더니 곧바로 끝없이 추락한다. 그러다가 지금은 물고기 뱃속에, 막다른 지점에 서 있다(1.1 1.17 2.1). 그는 12절의 하나님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는 기도하는 자가 아니었다(1.6). 어찌보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힘과 지혜와 노력을 다 동원해서 하나님이 니느웨에 대하여 가지고 계신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죽음으로 항의한 사람이다. 감히 하나님이 틀렸다고 온 몸으로 저항하였다. 그런 그가 마침내 하나님께 항복한다.

이러한 전환은 놀랍게도 물고기 뱃속에서 이루어진다. 환난과 고난과 좌절의 끝에서다.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은 축복 안에 있을 때는 감히 하나님을 버렸다(1.3). 고난의 폭풍 앞에서도, 그곳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도 깊은 영적(靈的)인 잠을 잤었다(1.5b). 그러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이라 당당하게 소개할만큼 파렴치할 정도였다(1.9).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하나님과 맞짱을 쓰듯 대결하기 위한 출사표를 던진다(1.10a). 그리고 선지자 포기선언서를 발표하기까지 하면서 하나님께 돌아가기는커녕 죽을 테니까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말하고서 끝내 선지자의 사명도, 하나님의 말씀도 다 자신의 몸과 함께 던저버린다(1.12,15). 이런 1장의 그가 어떻게 이렇게 2장에서는 달라질 수가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물고기뱃속신앙훈련학교]가 갖는 힘이다.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2)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주의 파도와 내 위에 넘쳤나이다.“(3)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4)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6b)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7)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9)

 

고난의 자리를 기도의 무릎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117절 다음에 곧바로 2장을 읽으니까 쉬운 공식처럼 보이지만 요나에게는 이를 위해 3일이 필요했다. 과연 요나는 어느 방향으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할지, 어떤 모습으로 물고기 뱃속의 자신을 이해하게 될지, 또한 그 이후에 대한 생각을 어떤 식으로 가닥을 잡아가게 될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으로 언행(言行)한다. 이것이 3일의 결론이다.

사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행동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행위가 있기까지는 그것을 위해 먼저 내적인 싸움과 그것으로부터의 승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요나는 상황과 형편이 최악(最惡)이던 물고기 뱃속에서 이 거룩한 일을 시작한다. 이것이 삼일삼야(三日三夜)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스올’(죽음, 음부, 2b)의 뱃속에서, 큰 물결의 바다 깊은 곳에서(3),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고 구덩이에 빠진(6) 바로 그곳에서 희망을 캐기 시작한다. 자신의 절망의 끝을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으로 이어가기 시작한다. 이 복된 일이 기도로부터 꿈틀거리고 있음을 주목한다.

사실 요나는 지금 몸뚱이 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 뱃삯을 지불하고 남은 돈과, 다시스행 배표도, 약간의 필요한 것들이 든 짐 보따리도 다 자기 품을 떠나고 마치 탕자처럼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캄캄한 물고기 뱃속에 앉아있다. 바로 이때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자리이다. 요나는 자기 자신에게 절망한다. 다 잃었고 모두가 다 자신의 품을 떠났다.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품을 떠났듯이 말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이 하나님은 이미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면목 없는 자신을 만나주시는 것이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자”(8a)라는 사실을 그리고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8b)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물고기 뱃속에서 말이다.

그것만큼 오직 하나님만이 유일한 희망이요 소망임을 처절하게 부르짖는다(4,7). 인생은 이렇듯 고통과 눈물의 골짜기를 통과해 갈 때,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때로 성공하고,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소유하게 될 때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주께로 돌리기도 한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에 처해 있을 때에, 오직 주님 밖에는 소망이 없을 때, 바로 그곳에서 주님을 부르며 통곡한다. 하나님은 실패와 좌절에서도 여전히 일하신다. 그리고 고통의 자리에서 요나와 그의 후예들인 요 나!’를 또한 부르신다. 이럴 때는 자존심 부릴 때가 아니다. 사람 눈치 볼 때가 아니다. 대충 하나님 이름 불러 놓고서 주여, 다 아시지요?”라고 말하면서 일어날 때가 아니다. 다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 앞으로 나아갈 기회다.

   

 

얍복 나루터의 야곱

 

이삭의 차남(次男) 꾀돌이 야곱이 그랬다. 그는 하나님의 섭리(25.23)를 인간의 권모술수(權謀術數, 25.27-34 27.1-45)로 바꾸어 버린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니느웨를 인간의 다시스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외삼촌에게서 망명생활을 한 후에 창세기 32장에 보면 거부(巨富)가 되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귀향을 시작한다.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마침내 형 에서가 400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야곱이 오는 길목을 향한다(32.6). 바로 그 밤에 야곱은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인도하여 먼저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하고(32.22-23), 자신만이 홀로 남는다. 그리고 그 유명한 천사와의 씨름이 시작된다(32.24-32).

하나님이 깊은 바다 속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를 기다리고 계시듯 얍복 나루에서 야곱을 기다리고 계신다. 그는 자신의 희망이 하나님께 있음을, 날이 밝으면 모든 것이 끝일 수 밖에 없는 바로 그 캄캄하고 공포스러운 밤에 깨닫고 마침내 하나님을 붙든다. 그는 자신을 포기한다. ‘속이고 빼앗는 자라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이스라엘이 되는 키(key)를 쥐고 계신 하나님만이 희망임을, 하나님만이 얍복 나루 이후를 복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고 깨닫는다. 그리고 통곡하며 그에게 간구한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32.26b, 12.3-4)

지금 이와 동일하게 요나가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이처럼 절망의 자리, 물고기 뱃속과 같은 곳에서 하나님은 위대한 일을 시작하신다. 한 인생을 만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신다. 지금은 이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다. 그는 더 이상 자가발전(自家發電)을 시도하지 않는다. 마침내 요나는 하나님께 항복한다. 주께 부르짖고 있고(2), 자신의 고난은 심은대로 거두는 것이지만(3), 그러나 악()을 선()으로 바꾸신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6b)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바르게 살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한다(9). 그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초라하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았을 때는 얼마나 당당하고 교만했었던가. 하나님의 은혜는 내가 누구인가를 보고 아는 것으로 측정된다.

비록 1장의 처지에 있을 때에 기도하지 않았다고 해서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다. 2장의 형편에서 기도하는 자로 회복되고, 자신을 처 복종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맛을 누리고, 하나님과 일대일의 만남을 겸손으로 무릎 꿇고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희망이다. 문제는 2장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2장의 사람으로 하루 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더라도 지금 나의 형편과 처지가 2장의 요나처럼 일어나야 할 때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을 느끼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요나는 이러한 영적인 통찰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고 있다. 그의 기도에는 많은 구약 성경의 말씀들이, 특별히 시편의 말씀들을 기억해 낸다(3.8, 5.7, 18.6, 30.3, 31.22, 50.14,23, 69.1-2, 142.4-5). 비록 이미’(1.17)의 사랑 안에 있었으나 아직그걸 모르던 자리에서 마침내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항복하는 기도자(祈禱者)로 회복된다.

   

 

부스러기 묵상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10)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영혼 없는 물고기도 삼키라면 삼키고(1.17), 토하라면 토한다(10).

하지만 오직 요나만이 마치 알은 낳지 못하고 소리만 지르는 닭처럼 마음껏 자행자지(自行自止)했었다. 그런데 그도 마침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요나는 죄행(罪行)으로 하나님을 떠났으나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를 찾아오셨기 때문이다. 나는 2장에서 보여준 요나의 모습의 실실(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성심을 다 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갔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4.16)

물고기 뱃속까지 추락해 있어도 다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스올의 뱃속 구덩이에까지 몰락했을지라도, 탕자처럼 돼지 우리에서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울지라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핍박하며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일지라도 하나님이 찾아오사 만나주시는 사람,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 다시 돌아갈 곳에 있는 사람, 다시 부를 하나님 아버지가 있는 사람, 그러니까 탕자와 같은 사람은 아직 희망이 있다. 요나의 희망은 그의 끝이 하나님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라는 은혜의 처소였다는데 있다. 세상 사람들의 절망은 그 끝이 허무요, 그야말로 아무 소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오는 포기(give up)에 있다. 그처럼 생각해 버리고, 스스로 결정해 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끝내 버린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다르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그 손 못자국 만져라!”(찬송가 4561)

그러므로 인간의 최대 교만은 하나님이 물고기 뱃속까지 당신의 보좌를 낮추셔서 요 나!’와 같은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1장의 요나처럼 살아가는 것이다. 그걸 보지 못하면 인생은 비록 1장의 요나처럼 하나님 안에 있을지라도, 그는 참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사는 특권과 축복 안에 거할 수 없다. 항상 인생은 폭풍행전이고, 세상(사탄)은 그러고도 그리스도인이라 말 할 수 있느냐 비아냥거리고, 그런 나 하나 때문에 내 옆에 있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마치 요나의 배에 승선한 자들처럼 고난과 고통 속에 살아가게 되고, 그런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재산의 손해까지 보게 되고(1.5a), 그런 나 때문에 물고기까지 3일이나 생활의 리듬을 잃게 된다.

나 하나 정신차리면 가정이 행복해 진다. 나 하나 바른 신앙에 서면 교회가 평안 가운데 든든히 서 간다. 문제는 나다. ‘요 나!’. 요나 한 사람이 바르게 서니까 한 도시(민족)가 복을 받지 않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나 한 사람이다. 그럼 나의 관심은 무엇인가. 정말 나는 무엇을 위해 오늘 이 세상이라는 물고기 뱃속에서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가. 나 역시 요나처럼 이 비밀을 깨닫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기를 소망한다. 일부러 이를 위해 요나처럼 살아볼 필요는 없지만, 내 안에 요나와 같은 습관이나 언행(言行)은 없는지를 촘촘하게 생각해 보는 시간들이 필요한 것 같다. 종종 나에게도 조용히 나를 돌아보아야 할 3일의 신앙훈련학교가 필요하다. 나에게도 분명 뭔가 전환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또한 물고기 뱃속에 넣으시곤 하실까?

                                   = 고통, 가난, 질병, 고독, 절망, 허무, 영적 침체

                                   → 그런 나를 하나님은 품으신다. 이것이 나의 물고기 뱃속이다.

                                        그렇다면 물고기 뱃속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이다.

                                   ♬ 오 신실하신 주: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X2)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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