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3(Eccl. 9.1-10)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희망이 있다.
본문 관찰
생의 공통분모(1-3)
산 자의 희망(4-6)
어떻게 살 것인가?(7-10)
산 자의 남은 여백(餘白)
8장의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 허락 받은 한평생을 사는 동안에, 언제나 기쁨(희락)이 사람과 함께 있을 것이다.”(8.15b) 그래서 솔로몬은 계속해서 생(生)을 즐기라고 권한다: “사람에게,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8.15a, 2.24-26, 3.12-13,22, 5.18-20, 6.2a) 문제는 이처럼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유한은 무한을 다 파악할 수 없다는데 있다(8.16-17). 이게 인생이다. 그리고 이게 전도자의 고민이기도 하다. 결국 전도자는 헛됨에서 헛됨(1.2~12.8), 그 해 아래서 살아가는 인생에게 아직 남아 있는 삶의 여백을 어떻게 채우며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도록 이끈다.
생의 공통분모(1-3)
산 자의 희망(4-6)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1)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모든 일이 일반이라.”(2a)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 인생의 마음에 악이 가득하여
평생을 미친 마음을 품다가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3a)
“모든 산 자 중에 참여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4a)
“무릇 산 자는 죽을 줄을 알되 ….”(5a)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러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와 더불어 미래에 대한 무지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일반이다. 이는 남녀노소(男女老少), 빈부귀천(貧富貴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무론하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이는 단순히 무신론적 비관주의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다. 모든 사람의 공통분모의 “결국이 일반인 그것은 해 아래서 모든 일 중에 악(惡)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 악(惡)이 가득하여”(3)처럼, 문제는 죄악(罪惡) 때문이다.
그러니까 생(生)을 즐기며(8.15a, 2.24-26, 3.12-13,22, 5.18-20, 6.2a)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다 불확실한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하나님의 손’에 이 모든 일들이 주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죄’와 더불어 공존하기 때문에 결국은 생이라는 것이 곧 죽음이라는 것, 이것이 전도자의 눈에 비춰진 인생의 실존이다.
죽음 앞에 모든 인생은 평등하다. 생(生)과 사(死), 그 사이에 각양각색(各樣各色)의 사람들로 살아가지만 후에는 죽은 자에게로 돌아가는 것, 이게 인생이다. 하지만 전도자는 인생을 결코 비관하지 않는다. 그는 아직 살아있음을 본다(4-6). 그게 희망이니까. 죽는 것을 미루거나, 바꿀 수는 없지만 그러나 살아있음만이 갖는 여백이 아직은 있기 때문이다. 전도자의 탁월한 지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죽은 자의 절망을 말하는 것들을 그대로 뒤집어보면 결국 그것만큼이 산 자의 희망이 된다. 바로 그 희망의 여백을 악(惡)으로 채울 것인가(3), 아니면 ‘희락’(8.15)으로 채울 것인가, 바로 그것이 아직 남아 있는 살아있음의 여백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 불확실한 ‘미래’(1) 이지만 말이다.
쉬운 전도서 읽기를 어려운 묵상으로 끌고가는 것 아닌가 싶지만 이 대목에서 뭔가 조금은 정리가 되는 듯하다. 피할 수 없는 일반인 죽음 앞에 서는 그날까지 아직 남아 있는 생(生)의 수레바퀴를 결국 헛되고 헛된 죄인으로 마감하면서도 끝내 아무 것도 모르는 자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면서 그 안에 채워주시는 희락을 누리며 살다가 죽을 줄을 알 것인가, 바로 이 교차로 앞에 서 있는 자가 인생임을 전도자는 통찰한다. 이것이 아직 산 자의 희망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7-10)
“너는 가서 기쁨으로 … 즐거운 마음으로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라.”(7)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지어다.”(9)
“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10)
산 자의 남은 여백(餘白)을 이처럼 채워가기를 나 역시 소망한다. 비록 여전히 해 아래서 의 세상은 헛된 평생의 모든 날이지만 기쁨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살아가야 할 사명이 이미 주어져있다. 이것이 8장 1절에서 말 한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하나의 열매 아닐까 싶다. 생을 가리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라고 눈물지을 겨를이 없다. 아직 ‘사람의 본분’으로 채워야 할 남아있는 생(生)의 여백을 ‘어떻게 살 것인가?’로 채워가기 위해 솔로몬과 더불어 지혜로(智慧路)를 따라 나선다.
부스러기 묵상
생은 결코 화려하거나 거창스럽지만은 않다.
‘가정행복’으로 생의 여백이 가득하기를 소망하는 전도자의 소박한 꿈이 마음으로 느껴진다. 가정은 “일평생에 해 아래서 수고하고 얻은 분복”(9b)이다. 가정의 행복은 그냥 주어지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가정은 헛되고 헛된 생으로 끝나지 않도록, 또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생의 현장(field)이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내 ‘가정행전’이 성취되어져가기를 기대하신다.
내게 주신 가정(家庭)을 생각해 본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처럼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것,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