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지혜는 멀고, 그만큼 깨달은 것은 적다(전 7.23-29).

  20221210(Eccl. 7.23-29)

 

 

 

참 지혜는 멀고, 그만큼 깨달은 것은 적다.

  

 

    본문 관찰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내가 전심으로 지혜를 알고자 하였더니

       ① 내가 깨달은즉

       ② 이것을 깨달았도다.

       ③ 내가 깨달은 것이

 

 

깨달은 것 세 가지

 

허무가(虛無街, 6)를 벗어나 지혜로(智慧路, 7)를 따라 달리고 있다.

전도자는 더 나은모든 것을 지혜를 통해 시험해 보았지만 지혜로의 시계(視界)는 아직 명쾌하지가 않다는 것을 시인한다(23-24). 그래도 그는 한 곳으로만 정신을 쏟아 지혜가 무엇인지 이해하여 알려고 전력하였다(25). 그러는 가운데 그는 다음 세 가지를 깨달았다는 것을 부연함으로써 지혜자 자신이 지금 서 있는 자리를 진솔하게 정리한다(26-29).

 

 

지혜자의 중간평가(23-25)

 

솔로몬은 자신의 생의 수레바퀴를 지혜라는 앵글에 넣어서 시험해 보았다. 그는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생각하고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지혜와의 멀고도 먼 간격을 보았을 뿐이며, 더욱 지혜가 멀고 깊어서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을 시인하기에 이른다. 누구보다 지혜자의 대명사였던 그의 중간평가와 같은 고백인지라 지혜의 높이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위로가 되고 찬찬히 뭔가를 돌아볼 수 있게 되는 이유는 그럼에도 지혜의 무상(無常)을 슬프게 노래하는 것으로 떨어지지 않고 어떻게든 지혜에로의 나아감을 소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알고자 하였더니.”(25)

솔로몬이 지혜를 깨달아 알고자 했지 지혜를 만들어내고자 함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역시 공급되어지는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피조물이라는 점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혜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었음을 회고한다.

솔로몬의 지혜묵상은 참으로 지속적인 것이었고, 그것만큼 오래 참음으로 오직 한 곳으로만 정신을 쏟은 놀라운 집중력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한 길을 묵묵히 걸어온 그것마저도 지혜의 부스러기임을 생각해 본다. 역시 지혜를 이미 받았으나 아직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몸부림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깨달은 것 세 가지(26-29)

 

이제 7장이라는 지혜로(智慧路)의 교차로에 서서 잠시 지금껏 깨달은 것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마음이 올가미와 덫과 같고, 손이 쇠사슬과 같은 여자는 죽음보다 더 독하다(26). 둘째, 참 지혜자는 1/1,000만큼이나 찾기 어렵다(27-28). 셋째,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냈다(29).

먼저 첫 번째로 깨달은 26절이다. 마음과 손이 금속처럼 차갑고, 올가미와 덫이나 쇠사슬처럼 결국은 남을 해치는 것으로 몸()과 마음을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설 곳이 없다는 -“사망보다 더 독한 자라.”- 전도자의 통찰이 눈부시다. 지혜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따뜻함을 주는 것을 잃어버릴 때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낳는가를 생각한다. 죽음보다 더 지독한 것으로 비유됨이 조금은 이해될 듯하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만큼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서 전도자는 첫 번 깨달음에 대해서는 지혜롭지 못한 자의 올무와 덫에 걸리지 않는 지혜의 빛을 비추어준다. 그것은 피하라는 충고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는 지혜로운 자로서 26절과 같은 자를 피하지만 죄인은 그 덫에 그만 걸리고 만다. 피할 수 있는 자로 살아가는 은혜는 무슨 방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람의 본분에서 나온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죄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지혜로운 자, 그러니까 사람의 본분을 다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건널 수 없는 간격을 볼 수 있음이 안심이다.

두 번째로 깨달은 27-28절이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 지혜자를 만나는 것인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27a)고 고백한다. ‘사람의 본분’(12:13-14)과 상관없이 헛되고 헛된 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지혜자를 만날 수 없다. 참 적절한 깨달음이라 생각된다.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세상의 헛된 것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찾아지고, 발견되고, 그렇게 살아도 그들 안에 깨달아지는 것이면 그것이 참 지혜일 수 있을까. 지혜자는 스스로의 터득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지혜를 은혜로 받게 되는 자의 몫임을 새롭게 묵상한다. 지혜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1.5-8):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1.5)

 

세 번째로 깨달은 29절이다. 이것은 7장의 결론이라 할 수 있다. “보다 나으니라.”는 지혜의 새 길을 따라 7장의 말미 앞에 서 보니, ‘사람의 본분’(12.13-14)을 따라 살도록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29a)라는 한 길(A), 헛되고 헛된 것을 추구하기 위해 많은 꾀를 따라 사는 길(B), 이렇게 두 길이 보인다. 문제는 하나님의 A를 사람의 B로 바꾸어 버렸다는데 있다. 이것이 지혜자를 찾고, 또 만나는 것이 어려운 이유다. 사람의 꾀를 통해서는 결코 지혜에 이를 수 없다. 하나님이 지으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만이 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다. 솔로몬은 지금 이 두 길의 건널 수 없는 간격을 보고 있다.

인간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잃어버렸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3.5)라는 거짓 지혜를 선택한 순간부터 인간은 죄의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인간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지혜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것만큼 사람의 본분을 떠난 인생들의 허사가(虛事歌)헛됨에서 헛됨까지(1.2 12.8)- 전도서의 무대까지 넘실거리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에 사람은 많은 에 불과한 것을 지혜라고 착각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참 지혜가 무엇인지 모르니까.

 

 

부스러기 묵상

 

    “내가 이 모든 것을 지혜로 시험하며 .”(23a)

    “내 마음에 찾아도 아직 얻지 못한 것이 이것이라.”(28a)

 

지혜를 찾고자 하는 솔로몬의 집요한 집념을 엿보게 된다.

하지만 사람은 많은 꾀를 냄으로써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사 지혜를 따라 살게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였다. 이것이 인간의 죄다. 죄는 이처럼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철저하게 파괴시켰으며, 그리하여 결국은 헛되고 헛된 쪽으로 추락하게 만들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모습으로는 결코 지혜 앞으로 가까이 나아갈 수 없을 뿐 아니라(23b), 또한 그것을 아무도 통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24). 이렇듯 인간은 지혜를 만들 수 없고, 결코 스스로의 힘이나 노력으로 지혜에 이를 수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솔로몬이 깨달은 것은 자신의 지혜 없음이다.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지혜에 의한 사람의 본분과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는 헛된 인생에게 지혜는 없다는 솔로몬의 통찰에 대해 나 역시 아멘이다. 지혜가 아닌 단순한 에 불과한, 그것도 하나님이 정직하게 지으신 것과 무관한 죄로부터 나온 를 바르고 옳은 것인냥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지혜는 결코 발견되거나 생겨날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자리로 추락한 순간부터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신적(神的) 지혜를 잃어버렸다.

놀라운 것은 솔로몬 역시 지혜 자체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단지 지혜를 찾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했고, 아직도 찾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을 뿐이다(28). 지혜와 자신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것을, 그만큼 그것을 알 수 없음을 깨달았을 뿐이다(23-24). 너무도 쉽게 지혜를 언행(言行)했던 부끄러움이 어느 때보다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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