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3(Eccl. 3.16-22)
심판과 죽음, 그 이후가 있다.
[구조 관찰]
A - ‘해 아래서’의 인간 상황
B - ‘일하시는 하나님’
A' - ‘헛된 수고를 따라 살아가는 죄인인 악인’
B' -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인 의인’
본문 관찰
악이 있도다(16)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17)
짐승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18-21)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22)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다시 무대가 ‘해 아래서’로 바뀐다.
인간은 다시 1.2-2.23절이라는 ‘해 아래서’의 인간 상황(A)으로 돌아감으로써 2.24-3.15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B)과 단절된다. 세상은 여전히 A를 좇는다. 하나님 없는 헛된 A의 수고는 B마저 삼켜버린다. 이렇듯 세상은 여전히 요지경이다. 헛된 수고를 따라 살아가는 죄인인 악인(A')과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인 의인(B')이 서로 함께 해 아래서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다(2.26). 하지만 이 둘은 끊임없이 서로 대립하며 싸운다.
“날 때와 죽을 때가 있으며”(2a)의 사이에서, 동시에 헛됨과 헛됨(1.2-12.8) 사이에서 이러한 영적 전쟁은 계속된다. 하나님에서 하나님(2.24-3.15)으로 이어지던 섭리의 때와 장소에도 ‘악’은 자란다(16). 참으로 무서운 세상이다. 더욱이 재판과 공의를 행하는 곳에 악의 쓴뿌리가 심겨져 있다는 것이 해 아래 세상의 역설이다. 이처럼 AA'는 할 수만 있으면 BB'를 도전하고 무력화시키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때’는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 그분은 이를 다음 두 가지를 통해서 성취하신다.
심 판(16-17)
죽 음(18-21)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17b)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니라.”(19b)
어떻게 해서든 인간은 헛된 세상(AA')을 꿈꾸면서 악인이 득세토록 집요하게 BB'를 파고든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기뻐하시는 자’인 의인(BB')에게 주신 지혜와 지식과 희락이 AA' 때문에 무너지거나, 무력화되거나, 세속화되거나, 실패하지 않도록 섭리하신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솔로몬은 이 일을 하나님께서 심판을 통해 성취하신다고 말한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12.14)
해 아래 세상의 심판과 공의는 죄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악이 심판과 공의를 그릇되게 만든다(16).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정직하며 공의로우시며 완전하다. 심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모든 행위는 심판 받을 때가 있다(17). 세상을 더욱 헛된 수고로 몰아 넣는 16절의 악은 결코 영원하지 못하며, 재판과 공의로 포장된 허울 좋은 헛되고 가증한 위선은 오직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시비(是非)가 가려질 것이다. 인간은 법과 공의의 이름으로 악을 도모하고, 악을 성취하며, 악의 뿌리를 깊게 내린다. 이것이 ‘헛되다!’의 세상이다.
일단 짐승에 대한 언급(18-21)은 다음으로 미룬다. 중요한 것은 AA'에게 닥칠 하나님의 섭리의 ‘때’인데 결국은 헛된 수고를 통한 욕심 → 죄 → 사망(약1.15)으로 추락하는 것, 이것이 BB'를 떠난 인생의 결론이다. 사람과 짐승이 존재론적으로 같다는 뜻이 아니라 인생이 하는 일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는 뜻이다. 사실 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지만, 그러나 핵심은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는, 해 아래 헛된 수고를 따라 살아가는 인생에게 불현듯 임하게 될 심판과 죽음에 대한 선언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17a)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
어떤 인생도 죽음과 심판을 면제받지 못한다.
이는 의인이나 죄인에게 공히 마찬가지다(17a). 하지만 해 아래서 헛된 욕망을 따라 썩어질 것을 위해 수고하는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은 당장 눈 앞에 있는 오늘만 본다. 그리고 거기에 죽음 이후에 맞게 될 심판의 요소들만을 심는다. 이게 1.2-2.23절 사이에 있는 죄인들의 실상이다. 결국 심판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드린 헛된 수고에 전생(全生)을 드릴 꼴이 된 셈이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은 그만큼 헛되다.
죽음 그 이후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심판을 믿는 자는 이렇게 산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것을 알았다.”(22a, 표준새번역) 결코 왁자지껄하지도, 자포자기하지도 않는 매우 균형잡힌 정상적인 삶을 산다. 이게 심판이 있음을 믿는 종말을 사는 자의 영성이다. 심판과 종말에 대한 계시는 전도서의 주제가 아니며, 구약은 신약이 증거하는 계시의 완성에 비하면 희미하다.
한편 BB' 편에 선 사람은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만큼 AA'로부터 그만큼 벗어나 있다. 그러기에 자기 일에 보람과 즐거움을 누리며 산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2.26)에게 주시는, 그래서 인생의 본분(12.13-14)을 다하는 자로 살아가기에, 그것으로부터 즐거움이 나온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내 일을 즐거움을 따라 행하며 살고 있다면 이것은 해 하래서 헛된 수고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부스러기들을 -“하나님이 그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니”(2.26a)- 따라 의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그걸 알았다고 했다(12-14).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14b)
오늘은 또 무슨 즐거움으로 하루를 살까. 내가 해 아래서 만든 즐거움은 건전지처럼 유한하지만 하나님이 위로부터 주시는 희락은 영원하다. 심판과 죽음의 문을 향해 헛된 수고를 계속하는 하나님 밖에 있는 ‘악인’(AA')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주께서 우리 교회를 사용하시고, 이 일에 함께 헌신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